'인간'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6/04 Focus on detail - Star Trek The Beginning
  2. 2009/03/24 최인훈 <화두>

Focus on detail - Star Trek The Beginning


 나름 특이한 군생활을 통해 1년 정도 배를 타고 살았던 적이 있다. 이동 수단으로서의 배와 생활 공간으로서의 배는 정말로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을 그 생활을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보통 군생활을 세상과 단절된 전혀 다른 세계의 경험으로 비유하곤 한다. 돌아보면 해상 생활이라는 것은 정말 전혀 다른 세계에 가깝다.

 타이타닉과 같은 호화 유람선은 잘 모르겠지만, 보통의 어선이나 함선, 화물선 등은 일단 대부분의 공간이 인간의 편의보다는 해상이라는 상황의 특수성에 최대한 맞추어져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양식도 특이한 점들이 존재한다. 해상생활은 항상 바다라는 위험한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각각의 선원들은 확실한 업무분담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군함이 아닐지라도 선장을 위시한 위계질서가 중시된다.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을 '항해'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바다' 역시미지의 공간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타 트렉과 같은 Space Adventure류의 SF 영화에서도 '우주선'과 그 내부의 환경을 대부분 '함선'과 '해군'을 메타포 삼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영화 초반, 위기상황에서 다급히 뛰어가던 선원이, 함장이 지나가자 경례 대신 통로 옆으로 붙어 서서 차렷 자세를 유지하는 장면이 있다. 해군 생활을 해봤거나 각종 영화를 통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는 좁은 통로에서 상관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종의 경례 자세이다. 통로가 좁고 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감안하여 손을 들어올리는 행위를 생략한 것이다.

 SF영화에서는 보통 진보된 기술과 그에 맞추어져 변화된 시설에 중점을 두고 최대한 멋지고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더 흥미로운 것은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이다. 수백년 후의 미래에서도 지금과 같은 행동양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을까?

 사회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상황'이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이를 실험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또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동아시아 경제 부흥과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흔히들 말하는 '국민성'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오히려 경제 구조가 변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양식이 변했다는 점을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 결과에서는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통해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감정에 의한 행동을 하고 그 이후에 이성을 통해 합리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전 경제학의 기본 근거인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는 인간'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합리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왔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애초부터 합리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단지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믿음, 혹은 합리적 인간에 대한 지향이 마치 도그마처럼 번져나가자 이에 대한 반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근친상간'이 금기시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혼인'을 통해 새로운 세력과의 동맹을 맺어 세력을 확장하고 안전을 담보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혼인'을 통한 동맹과 세력 확장이 유효한 것을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어느 정도 기득권을 가진 혈족에서 '혼인'의 의미란 석기시대 이후로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개별적 인간의 행동은 '감정'에 기초하며, 사회적 행동은 '상황'에 근거한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스타 트렉에서 보여주고 있는 우주선 속의 행동 양식은 분명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기술문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을 둘러싼 구조적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영화 'Idiocracy'와 'Wall-E'에서 꼬집고 있듯이, 기술 발전과는 별개로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수준은 되려 퇴보하게 될 수도 있다.

(p.s. 최근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 설계, User Experience 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다. UX의 진보가 진정 '인간을 위한 기술'이 되어서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인가. 우리네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널리'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인터넷을 통한 매체의 혁명도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기에 앞서 자본의 논리에 잠식된 것처럼 보이기에, 한동안은 확신이 없이 지켜볼 뿐이다.)

- 비선형적 사고에 의한 귀납적, 비논리적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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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화두>

"인간의 오늘은 어제의 부활이며 윤회이다 오늘의 자신이 어제의 자신과 동실시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기억이다."
-서문 中에서

 

...한 사람에 몸뚱아리가 하나씩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불행의 뿌리였다. 다른 자기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몸의 일부인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 그런데 그 몸은 지금 다른 마음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마음을 섬길 수 없다는 것. 짐승들이 모르는 사정이다. 그것이 차츰 형성된 나의 생각이었다.

 이 생각이 내가 차츰 희곡과 연극에 기울어진 까닭이기도 하였다. 소설을 쓸 때 등장 인물들의 마음과 육체의 불일치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어도 서술자가 잘 삭여서 독자가 탈없이 받아들이게 돌봐준다. 그것이 <지문(바탕글)>이다. 희곡에는 이 <바탕글> 이 없다. 눈에 보이는 배우의 몸, 그 몸의 움직임, 들리는 말 - 이것들이 그대로 바탕글이기도 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벌어지는 모든 일의 중심인 서술자의 간섭으로 충격은 시시콜콜 설명되고 따라서 완화된다. 연극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마음과 몸뚱아리의 어긋남은 피할 길 없이 드러난다. 같은 몸뚱아리에 두 마음이 겹쳐 있는 것이 보인다. 짐승이기도 한 사람은 그것이 충격이다. 일편단심이니,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라는 식으로 인간의 짐승의 감각 가깝게 인간의 규칙을 표현하려고 애를 쓴다. 그 원칙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을 우러러 모신다. 그러나 우러러 볼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예외자다. 그들은 번듯하게 육신을 가졌으면서도 실은 사람들의 꿈이 화신한, 살아 있는 꿈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꿈으로서> 살지는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사람은 늘 그렇게 말하면서 산다. 사람은 짐승으로 태어나서 끝도 한도 없는 <사람>으로 다시 자기를 만들어가면서 사는 것이었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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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무라 가오루의 'Skip'에서는 열 일곱 살에서 갑자기 25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자신으로 변해버린 여주인공, 이치노세 마리코가 등장한다. 기억상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의식이 시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존재의 근거라는 것 또한 또렷하지 못한 스스로의 기억일 뿐이다. 나역시 때때로,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는 몸뚱아리에만 새겨저 있는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내게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기억들은 일관성있게 이어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드문 드문 산재해 있는, 의식의 조각에 불과하다.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25년 후의 전혀 새로운 내가 되어 있다는 느낌. 앞만 보고 달리다 그림자조차 잃어버린 자신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느낀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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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도 아마 깊은 연극적 감동을 경험했으리라.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으로, 이야기로 읽었을 때와 내 손으로 희곡을 써본 것 사이에는 큰 다름이 있었다. 희곡으로 써보고서야 비로소 <이야기>의 깊이를 알았다고 하면 틀리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무엇인가 그만한 것이 닳아져 있다. 그것을 되살리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영혼의 기능 마비를 다스릴 재활의학 같은 것,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설명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주어진 생물학적 기능의 마비에 대해서만 통하는 설명이다. 신화나, 전설은 생물학적으로 이해할 주어진 기능이 아니라, 인간이 짐승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창조한 <제2의 감각>이다. 그것은 배우지 않으면 <없고>, 배워야만 <있게 되는> 인간의 인공 기능이다. 인공기능의 뿌리는 <영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짐승들이면 다 가지고 있는 <감각>이다. 감각은 가만히 놔두면 짐승의 욕심일 뿐이다. 신화적 감각은 <재활>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 그것을 만든 옛사람들도 <배워>서 그것을 <자기의 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승>된다는 것은 그 <배움>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말을 뜻할 뿐이지 재물을 물려받는 것처럼 되지는 않는다.

- p.158  

 

...제길 될 대로 되겠지, 인형이 좀 어떠면 세상이 큰일 날까, 이렇게 통이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쟁이들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치 때문에 우주가 삐뚤어진다고 생각하기로 한 약속이 연극이다. 한 음정쯤 틀리다고 뭐, 이렇게 생각하는 곳에 음악도 없다. 적어도 남들더러 들어 주십사 하는 일로서의 음악은 없게 된다. 모든 일이 자로 재고 저울로 달린 후에 있을 데 있게 하는 것. 결코 그렇게만은 될 수 없는 세상에서, 구석구석의 먼지까지 황금비례에 따라 있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환상의 현실이 노래가 되게 하는 일. 사람들은 노래를 만드느라고 망치와 드라이버를 들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 p.189

 

이 방에 다시 와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 그러기 힘들 것이었다. 이 자리는 내가 다니느 학교도 아니었고,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었고, 내가 근무한 부대 막사도 아니었고, 내가 가르치는 학교도 아니었다. 사람의 평생에는 그러고보면 그런 장소가 따로 있다. 눈 감고라도, 하고 흔히 말하듯이 일정한 인생의 어느 시기에 수없이 오가는 길과 그 길 끝에 있는 장소 - 학교, 예배당, 막사, 직장. 그런 곳에다 사람들은 자기를 조금씩 남기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말해야 좋을지, 아니면 그런 것과 어우러져 그 순간마다의 이른바 <나>가 그때마다 이루어진 연속으로서의 나. 집과 학교 사이에 개미들의 행렬처럼 이어진 나, 나, 나, 나, 나, 나...... 학교에, 예배당에, 막사에 도착하면, 그 마지막 <나>만 남고 다른 나들은 모두 그 마지막 <나> 속으로 마치 개미굴 속으로 들어가는 개미들처럼 차례로 들어와 겹친다. 그래서 마치 작은 구멍만 남는 것처럼, 구멍에 보초처럼 서 있는 마지막 나가 <나>로 통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지. 이 개미구멍 속의 <나>들이 우리가 <기억>이라 부르는 물건이다. 사람들은 이 물건은 개미구멍 속에 남겨놓고 <말>이라는 지폐로 바꾸어서 편리하게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에게 뿌리 깊은 현물경제 심리는 기억들은 그 환상의 굴이거나 아니면 도중의 길바닥에 흩어져 떠돌거나 어느 나뭇가지나 담벼락에, 걸어간 복도 한 구석에서 서성거린다고 생각하기를 즐긴다. 나는 이 자리에 남겨 놓고 갈 나를 생각하고 그가 저 혼자 견뎌야 할 시간을 생각했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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